산다는 것이 어찌 이리도 지난하고 반복적인지, 그러면서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는데 웨이는 그 명제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췄다. 때로는 살려면 누군가를, 무언가를 죽여야만 했다. 그건 그라 해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는데 추운 곳에 갈수록 이상할 정도로 그게 양 어깨를 눌렀다. 누군가가 바란 대로 다시 쓰인 사건과 역사 앞에 웨이는 아주 가끔 그 들판을 떠올렸다. 그곳에 다시 설 수 있다면 돌이킬 것인가? 아니, 아니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 보았자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무용했다. 한 번 쓸모 없다고 결론지어진 것에 시선을 두지 않는 것, 흑표는 그것을 웨이에게 가르쳤다. 들판에 서서 말이다. 그런데도 웨이는 말뚝 박힌 것처럼 한두 번씩 그곳으로 돌아왔다. 햇빛이 따사롭고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으며 바람이 달리는 발자국이 여실히 보이는 어느 들판, 어딘지도 모를 곳에 서 있었다. 오래 그러고 있지는 않았지만 헬멧 속에서 답답하게 숨을 쉬다 보면 가끔 그날이 떠올랐다.
특이점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소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역사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며 빌 만큼의 소원이 있다는 것이 생경했다. 웨이는 어느 시점 이후부터 쫓기듯이 살았고 무언가로부터 달려나갔다. 꼭 어딘가로부터, 누군가로부터, 어느 피로부터 도망치는 것처럼. 어느 특이점에 가도 소원이 강마냥 흘렀는데 웨이는 빌 소원이 없었다. 다시 만나고 싶은 이가 있는 것과 그를 볼 면목이 없는 것은 공존할 수 있었다. 엉키고 설키는 어떤 선로처럼.
그래서 웨이에게 있어 특이점은 선로였고 성배는 레버였다. 레버를 당기면 누군가는 죽지만 누군가는 산다. 누군가의 소망은 짓밟히지만 누군가의 생명은 보장된다. 레버를 당기는 건 언제나 그였고 그래서 이따금 그는 제 어깨의 무게를 인식했다. 그럴 때 맨발로 산을 오르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그는 고개를 숙일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그런 건 배운 적 없었다.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망선고 / 유예된 (0) | 2026.02.12 |
|---|---|
| 산중 / 맨발로 달리는 (0) | 2026.02.12 |
| 들판 / 흉중에 빛나는 (0) | 2026.02.12 |
| 시적단문 (0) | 2026.02.12 |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불처럼 군영을 달렸다. 흑표는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했다. 자신이 가르친 부대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몰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죽고 사는 것은 그에게 해가 지고 뜨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고 그게 누구라 한들 마찬가지였다. 다만 바다에는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이까지 죽은 것은 조금 의외였다. 그는 사망 처리서에 서명을 하다가 검은 단발을 한 사람 페이지에서 잠시 손을 멈추었다.
웨이는 영특했다. 빛을 다룰 줄 안다는 건 군에서 양 손을 들고 반길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흑표는 그런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웨이의 태도, 그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눈길을 두었다. 바다를 상상하면서도 두 다리는 들판에 꼿꼿하게 붙이고, 먼 곳을 보면서도 부르면 금방 고개를 돌렸다. 나약하고 흔들리되 부러지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고목보다 오래 살아남는 게 갈대인 법이었다…… 그러나 웨이의 사진 위에는 사망을 뜻하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제 흑표는 거기에 서명을 해야 했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쉬웠다. 펜이 종이를 달리며 그 궤적마다 잉크를 남기는 건 흑표가 검을 휘두르고 그 곡선마다 피가 튀는 것과 무엇 하나 다를 게 없었다. 그 길이 지나가면 누군가가 죽게 된다는 것까지도 똑같았다. 그래서 흑표는 하루에도 몇 명을 죽였다. 그에게 사사받은 이들조차 이따금은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들판에 서서 바다를 보던 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쉬운 일을 앞에 두고 가만히 그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에서 어떻게 빛나는지, 어떤 색을 하는지, 그래서 바람에 날릴 때는 어떤 선을 만들며 나부끼는지 그는 알았다. 그것이 그의 죽음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이 둘은 기차 선로처럼 상충했고 흑표는 만년필을 손에 쥔 채 도장 아래 깔린 시체를 쳐다보았다. 그 시체는 꼭 살아 있는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트롤리 딜레마 / 배운 적 없는 (0) | 2026.02.12 |
|---|---|
| 산중 / 맨발로 달리는 (0) | 2026.02.12 |
| 들판 / 흉중에 빛나는 (0) | 2026.02.12 |
| 시적단문 (0) | 2026.02.12 |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군홧발인지 맨발인지 분간이 가지 않도록 내달린다. 왼발로 밟은 땅을 오른발로 짚으며 그는 달렸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뒷모습은 무언가에게로 달려가는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검은 밤, 그는 자신이 즈려밟은 것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통에 딱딱한 발소리가 조급하게 울렸다.
내려가야 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했다. 자신이 무엇을 당하고 무엇을 저지른 건지조차 몰랐지만 그 하나만이 경종처럼 머리에서 울렸다. 무엇이 생략된 삶은 목적지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앞을 보지도 않았다. 바닥, 바닥만 내려보며 뛰어도 괜찮았다.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야 한다면 달린다는 것이 중요했지 방향은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됐다. 그러므로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그 질문은 대답할 수 있었다. 웨이는 살기 위해 도망치고 있었다. 앞발에 큰 상처를 입은 흑표가 비틀거릴지언정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듯이 그는 가장 원초적인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가장 본질적인 것이 가장 날카로운 법이다. 웨이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뛰었다. 산의 능선 너머로 해가 뜨고 있었다. 완전히 밝아지기 전에 저 산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산에는 은신할 그늘도 숨어들 나무도 많으니 적어도 당장은 들키지 않으리라. 살기 위해서는 가끔 후퇴해야 한다는 걸 그는 알았다. 흑표에게서 사사받은 수많은 것들 중 가장 처음 배운 명제가 그것이었다. 패배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정말이지, 살아야 했다!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살아남아야 했다. 그의 본능과 그의 스승이 그리 말했다. 한쪽 군화가 벗겨진 줄도 모르고 웨이는 산을 탔다. 돌부리에 걸려 발이 찢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법은 배우지 않은 탓이다.
그가 걸은 곳마다 바람이 불었다. 점점 사위가 밝아져서야 그는 제 손금을 따라 피가 묻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가 죽고 사는 거야 익숙했지만 이런 감촉은 처음이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그런데도 그는 서 있었다. 두 손을 피에 담그고도 살아 있었다.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트롤리 딜레마 / 배운 적 없는 (0) | 2026.02.12 |
|---|---|
| 사망선고 / 유예된 (0) | 2026.02.12 |
| 들판 / 흉중에 빛나는 (0) | 2026.02.12 |
| 시적단문 (0) | 2026.02.12 |
그곳에서의 모든 날이 평화로웠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만 이따금은 그런 날이 있었다. 이상하게 훈련도 순조롭고, 다른 동기들은 각자 개인 일정을 하거나 쉬러 가고, 그래서 고요하고 조용한 날. 그럴 때 웨이의 옆에는 으레 흑표가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제사 그런 날을 되짚어 보면 흑표가 옆에 없는 게 드물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위안은 그로 쉽게 환원되었다. 웨이가 그를 존경하고 잘 따르던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세상 일은 의외로 ‘별개’가 많은 것을 대체할 수 있었다. 웨이의 평온을 은유하면 흑표가 되는 것처럼.
그날은 날이 좋아서 흑표가 나간 외부 훈련에 그도 따라나섰다. 어느 들판이었는데 군 부대가 산에 입지를 두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였다. 그날 웨이는 들판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바람이 달릴 때마다 풀들이 밟히고 흔들려서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는 그는 들판이 곧 바다일까, 하며 상상에 잠겼다. 녹색 파도가 치면 흰 별 같은 포말이 피어나고 짧은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끼니 지금 밟고 있는 게 흙이 아니라 모래톱 같았다. 웨이가 말없이 산에 가로막힌 지평선을 바라볼 때쯤 흑표가 입을 열었다.
율스.
예.
무엇을 보고 있지.
그 말에 웨이는 천천히 바다로부터 돌아왔다.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는 대답했다.
바다를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바다라.
흑표는 잠시 그 검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이 훈련생은 가끔 이렇게 먼 곳을 보는 눈을 했다. 풍선처럼 매여 있는 것을 한 번씩 매듭지어 주는 게 그의 몫이었다. 흑표는 바다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을 곱씹으며 들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게 들판은 그냥 평지였고 결코 바다는 될 수 없었다. 그런 상상을 하다니 나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소리내 말하지는 않았다. 아주 가끔, 해가 이렇게 들면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느린 바람이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검은 머리카락이 점점이 나부꼈다. 웨이는, 왠지 그러고 싶어서, 엷게 미소지었다. 그런 날이 있을 수도 있었다.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트롤리 딜레마 / 배운 적 없는 (0) | 2026.02.12 |
|---|---|
| 사망선고 / 유예된 (0) | 2026.02.12 |
| 산중 / 맨발로 달리는 (0) | 2026.02.12 |
| 시적단문 (0) | 2026.02.12 |
연약한 것에 흥미 없으며 나약한 것에 연민 없고 부족한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본디 그러했고 예전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게 그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철혈 같은 길을 걸으며 그는 불만이 없었다 그보다 더한 길을 그의 왕은 걸었을 것이다 — 그걸 생각할 때마다 그는 눈앞의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이 강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 옛 제자의 나약함을 볼 때마다 얼굴을 굳히곤 했다, 그 간극마다 제자는 걸려 넘어질 것처럼 비틀거렸고 옛날과 달리 금세 중심을 잡지 못했다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고 흔들릴 만큼 나부끼면서
그러나 그것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나부끼는 검은 머리를 볼 때마다 무언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수많은 것이 교차되면서 양자역학적으로 겹쳐지는데
그건 꼭 어느 눈 오는 봄날 같았다; 그는 머리오리 흩날리면서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한들거리는 제자의 어깨를 잡았다 최악일 때만 만나지 않느냐는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나약하게 가르친 적은 없는데, 그의 왕은 이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데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가장 이상했다, 그것이 정말로 이상했다
그는 제자 옆에 서서 눈보라를 맞으며
고꾸라지고 몇 번이고 엎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못하는 것 곁에서 함께 걸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어쩌면 그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 둘이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다를지에 대해서는 굳이 들춰보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몇 번이고 흩날리면서도
중심을 잃어가면서까지 내달리려 하는
그 옆얼굴일지도 몰랐다, 연약하고 나약하고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는
세상의 중심에서
'BACKU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트롤리 딜레마 / 배운 적 없는 (0) | 2026.02.12 |
|---|---|
| 사망선고 / 유예된 (0) | 2026.02.12 |
| 산중 / 맨발로 달리는 (0) | 2026.02.12 |
| 들판 / 흉중에 빛나는 (0) | 2026.02.12 |
새벽 2시 54분이 될 때까지 진심 쇼를 해서 갠홈을 겨우 장만했다. 사실 아보카도 에디션이 있는데 뭐라고 하지 좀, 디자인이 전혀 안 되어 있어서 쓸 의욕이 뚝뚝 떨어지는 기분··· 어쨌거나 원하던 스킨도 할인가로 얻었고 적당히 꾸미는 것도 가능하니 만족한다.
디지털 다이어리도 사서 써봤는데 무료 어플 + IPAD 환경이어서 그런지 폰트 적용이 전혀 안 되어서 손글씨를 써봤다. 그런데 글씨가 정말, 정말, 못 봐줄 수준이고 꾸준히 손글씨를 쓴다는 게 굉장히 귀찮은 경험이어서 관뒀다. 이렇게 타자를 치는 식이면 좀 나을까···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 갠홈 배너도 만들고 배너 카테고리도 추가하고 공지사항도 꾸미고 이것저것 해야지. 야호!